실증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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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유럽과 미국에서 개최될 다양한 전기차 세미나의 참가를 독촉하는 메일이 빗발쳤다. 이 행사들의 프로그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반 이상이 일반적인 전기차 세미나에서 다뤄지던 전기 파워트레인, 충전, 표준 관련 기술과 동향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 주요 시정부, 연구기관, PSA나 다임러 같은 OEM들은 물론 페덱스, 테스코 등의 물류 및 유통사, GE나 코카콜라와 같은 대기업, 허츠나 집카 같은 플릿 운용사들이 지난 2~3년 간 수행한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평가, 그리고 차기 프로젝트를 논하는 자리였다. 주행, 충전 등 차량 성능 모니터링은 물론 CO₂ 저감효과, 운용비용, 운용 시스템에 대한 실증이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전기차 실증사업은 매우 중요하다. 경험의 축적은 물론 초기 전기차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렇다 할 사업이 없다. 실증사업의 경과로만 비교한다면 우리는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과 비교할 때 2~3년은 뒤쳐져 있는 것”이라며 “기술적으로도 인버터 등 핵심 컴포넌트의 국산화가 이뤄진 것도 아니다. 완속충전도 완전치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국의 전기이동성 전개에 대해 “진행이 느린 것 아니냐”고 물으면 정부는 이를 강하게 부정했다. 예를 들어 전기차 거점도시를 막 선정하고 중단기 보급 목표와 전기택시, 카 셰어링 등의 몇몇 비즈니스 모델을 마련하며 기대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프로젝트들은 기업, 지자체들이 수개월 간 모델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마치고 제안하며 이뤄진 것들이었다.
그러나 달력이 또 바뀌어도 눈에 띄는 사업은 남산 일대를 돌고 있는 9대의 전기버스, 연말이 되면서 50대 이상으로 불어난 영광의 저속전기차 플릿 정도뿐이다. 이들 사업들은 시민들이 실제 주행하는 전기차를 쉽게 보거나 타볼 수 있다. 거의 모든 사업들이 규모가 매우 적거나 예산, 차량, 제도에 발목 잡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다.
차는 준비됐다
한 대기업의 관계자는 “진행 중인 실증사업이나 준비 단계의 모델에 대한 취재를 요청한다면 오히려 화를 낼 것이다. 차량의 구입에서 주행까지 모든 과정에 애로가 많다”며 “전기차 시장 개발에 대한 정부 정책과 의지가 명확하지 않다보니 최근들어 기업들의 의욕이 심각히 저하돼 있다. 요즘은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GM 등 전기차 부문의 선두주자들, 그리고 기술 이미지와 배출저감 목표 대응이 중대해진 독일의 프리미엄 메이커들은 전기차 모델을 대거 출시하거나 미래형 프로토타입 수를 더욱 늘렸다. 또 갈수록 전기차 실증사업 규모를 키우는 등 전기이동성 추진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 일본 등지에서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전기차를 판매 중인 GM과 닛산 등은 새 모델을 내놓을 예정이고, 다양한 모델을 준비해 온 르노는 프랑스 정부, 기업들과 긴밀히 협조하며 대량의 보급 물량을 확보해 놓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파이오니어’란 명성을 얻고 있는 BMW의 경우엔 ‘BMW i’라는 별도의 전기차 브랜드를 론칭하며 프리미엄 전기차란 독특한 비전을 전개하고 있다. BWM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각국과 미국 등지에서 600 대 이상의 MINI E 플릿을 운용했고, 최근에는 1,000대 이상의 ActiveE를 미국, 유럽, 중국시장에 투입하고 있다. 지난해 4월에는 ‘드라이브나우(DriveNow)’ 카 셰어링 서비스도 론칭하고 전기차도 투입키로 했다. 선진 메이커들은 그동안 대규모 전기차 실증을 통해 각종 기술 데이터, 소비자 반응 조사, 미래 이동성 연구 등을 통해 전기차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새해 기아자동차가 현대자동차의 블루온에 이어 ‘레이(RAY, 프로젝트 명 탐)’의 전기차 버전을 출시한다. 르노삼성은 SM3 전기차를 론칭할 예정이다. 또 OEM들은 2015년까지 거의 매해 새로운 전기차 모델의 출시 계획을 잡아 놓고 있다.
현대ㆍ기아자동차의 한 관계자는 “과연 생산되는 고속전기차들이 원활하게 시장에 보급되고 운행될 수 있을 지가 걱정이다. 전기차는 단순히 차를 출시하고 주행시키면 끝나는 차가 아니다”라며 “충전 인프라 등 각종 제반 시스템이 구축되고 운행돼야 하는 이동성을 파는 사업으로 일관된 정책, 효율적 추진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지식경제부의 한 관계자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전기차 산업을 육성한다면 그린카 4대 강국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녹색성장을 강조하며 빠른 시일 내에 선도국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 청정에너지와 녹색기술을 통해 세계적인 기후변화와 에너지 안보에 대응하고, 신성장 동력을 끌어내는 한편 신규 일자리를 대거 창출하겠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2020년까지 세계 7대 녹색강국에 진입한다는 ‘저탄소 녹색성장(green growth)’을 국가비전으로 제시했고, 자동차와 관련해서는 2010년에는 2015년을 목표로 그린카 4대 강국의 지위에 오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린카 4대 강국
연말을 지나며 정부와 업계의 화두는 “한국의 전기이동성 너무 늦는 것 아닌가”에서 “패스트 팔로워가 아닌 선도국을 목표해야 하는가”로 바뀌었다. 고속전기차의 양산이 임박하면서 전기이동성의 순조로운 전개를 위해 목표를 보다 낮게 잡고 인프라, 인센티브 제도,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키 위한 방안 마련을 위해 분주했다. 각계의 의견을 모았고, 해외 선진국을 벤치마킹했다.
산업연구원의 이항구 박사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무엇보다 무엇이 우선돼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집행할 정부의 추진체계가 명확치 않다보니 모든 일이 더뎠던 게 문제”라며 “저탄소녹색성장, 국가에너지 안보, 저탄소녹색 교통체계 마련에는 모두 이의가 없다고 하지만 전기차의 우선순위가 밀렸다”고 말했다.
미국 등 전기차 선진국과 주요 대도시들은 국가에너지 안보, 기후변화 대응, 경제성장에 있어 전기차를 매우 중대한 애플리케이션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 주정부, 민간 기업들이 서로 협력해 전기차에 대해 다양한 우선권을 부여하며 스마트한 친환경 정책, 다양한 인프라 이니셔티브, 편리한 오퍼레이팅 시스템을 결합시킨 전기이동성을 진척시키고 있다. 구매 보조금, 세금 혜택, 우선 주차, 다인승전용차로 이용, 행정 간소화 등의 특혜는 물론 그린카의 의무 판매를 강제하는 배출규제 정책, ISO 환경표준 등을 연계시켜 전기차 수요를 늘리려 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거의 모든 것이 제대로 실행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초기 전기차 시장 개발의 핵심으로 전기차 값을 낮춰줄 구매 보조금, 세제혜택 등 인센티브는 여전히 실행되지 않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전기차가 우선되지 못하고, 관련 부처의 이해가 각각 다르다보니 뭐하나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게 없다. 관련 법령 등 제도정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하소연 했다.
현대 탓인가
지난해 9월, 이탈리아 등 유럽에 휴가를 다녀 온 프로스트앤설리번의 한 관계자는 “취재 협조를 하면서 마이크로 카, 마이크로 전기차, 마이크로 전기버스, 전기 트램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는데, 정말 유럽에서는 이런 차와 교통수단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소형 전기차나 개조 전기차를 보기 힘들다. 심각하게는 전기이동성의 일부를 담당해줘야 하는 전기차 전문 메이커들이 무관심 속에 거의 다 망한 상황이다.
유럽 등 선진국과 달리 우리 정부에게는 ‘전기차 전문 메이커들을 지원해 차량을 실증하고 기술력을 높여 보급을 늘림으로써 국민들에게 전기차를 친숙하게 만들고, 해외의 틈새시장을 개척하겠다는 계획이 없었다. 오로지 메이저 메이커의 고속전기차만이 전기이동성의 대상이었다. 전라남도 영광에 이른바 저속전기차 ‘보호구역’이 설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런 차는 ‘안 된다!’, ‘고려사항이 아니다’라는 게 정책의 현주소다.
저속전기차 산업뿐만 아니라 업계의 대부분 관계자들은 “전기차의 보급 정책과 R&D가 현대기아자동차에 맞춰져 있으니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다”며 “메이저 OEM 입장에서 전기 파워트레인은 단지 많은 파워트레인 기술 옵션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특정 기업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 기업이 전기이동성에 나서지 않는다면 영원히 전기이동성의 미래에 들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과 같다. 물론 현대기아차가 전기차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선진 메이커들을 추격하고 세계시장에 대응해야하는 현대의 전략은 국가비전과 일치할 수 없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가 더 적극적이길 바란다고 하는 것은 현대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명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책을 통해 에코시스템 내의 기업들이 전기이동성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도록 국내시장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전기바이크, 저속전기차, 고속전기차, 전기밴, 전기버스 등 다양한 모델의 개발과 보급, 인프라 구축이 요구되고 국적을 불문하고 기업들에게 기회를 줌으로써 경쟁을 촉발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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