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자동차, 고민하는 엔지니어
자동차 엔지니어로서 일반 운전자들에게 “자동차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갑자기 던지면 어떤 답이 돌아올까 궁금할 때가 있다. ‘여행의 동반자’, ‘운송 수단’, ‘질주 본능’ 등 개개인의 서로 다른 관점이나 환경의 차이를 보여주는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답들이 곧 소비자의 요구사항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질문을 약간 바꿔 “자동차가 하는 역할(기능)이 무엇인가?”라고 물어본다면 어떨까. 물론 다양한 답이 쏟아지겠지만, 시대의 의식에 따라 아마도 그 대답이 조금씩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에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고장없이 주행할 수 있는 기능이 자동차가 가져야 할 성능이었다면, 지금의 자동차는 목적지까지 안전을 보장하면서 편리하고 쾌적하게 친환경적으로 주행할 수 있는 기능을 얘기 할 것이다. 미래의 자동차는 여기에 무공해, 사고예방, IT 융합 등의 용어들이 추가될 것이다.
이처럼 자동차라는 상품 혹은 그 기술은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진화의 정도는 소비자의 요구와 현실 기술의 발전도에 따라 결정되지만 사고 저감, 친환경 정책과 같은 사회적 합의 또는 규제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또한 진화가 계속될수록 자동차에 적용되는 기술의 속성도 달라지고 있다. 즉 자동차 기술의 특성이 전통적인 기계 기술의 결정체에서 전기, 전자 시스템이 결합하는 융합체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겉으로 보이는 자동차는 큰 변화가 없지만 그 내부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똑똑해지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의 진화는 ‘지능화’, 즉 똑똑한 자동차를 의미한다.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차량을 구입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자동차 개발자들에게 이 문제는 새로운 기술 접목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복잡한 기계 시스템은 기술적으로 매우 어렵기는 하나 일단 만들어진 자동차는 정해진 기능 내에서 안정적인 동작을 한다. 하지만 제어 기능, 즉 지능을 가지게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개발자들도 예상할 수 없는 문제들이 주행 중에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안전이 최우선인 자동차에서 이러한 문제는 심각하다.
후측방경고시스템(후방과 측방의 차량 또는 사람 등을 검지하여 운전자에게 경고하는 시스템)을 예로 들어보자. 이 시스템은 대개의 경우 사이드 미러에 카메라를 장착하고 카메라가 후측방의 물체를 검지하여 주행 중이나 주차 시 문제가 되는 물체가 있을 경우 이를 검지하여 경고하는 시스템 구성을 갖는다. 여기서 문제는 자동차의 자율성이다. 즉 자동차는 주야간, 우천, 폭설, 터널, 시장 골목 등 다양한 도로 환경 위를 주행하기 때문에 개발자가 이러한 모든 경우를 가정하여 센서 및 제어기를 설계한다고 할지라도 자칫 고려하지 못한 상황이 실제 도로에서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운전자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 제안된 시스템이 잘못하면 오히려 운전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줄 수 있다. 엔지니어들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안타깝게도 이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다. 완벽한 방안은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바로 “시뮬레이션(Simulation) 기술”이다.
해법은 시뮬레이션 기술에
시뮬레이션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실제 또는 가상의 모델(모형)을 이용하여 연구하는 것, 모의실험 또는 모사(模寫)”를 뜻하는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의 여러 문제 또는 현상을 컴퓨터를 이용하여 적절히 모델링하고 이를 이용하여 우리가 개발하고자 하는 시스템 또는 부품을 설계하고 개발, 평가하는 일련의 과정을 총칭하여 시뮬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개념이나 사전적인 정의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시뮬레이션은 공학 분야에서는 전통적으로 컴퓨터를 이용한 수치해석 기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유한요소법(Finite Element Method, FEM)을 이용한 구조해석, 열해석, 유동해석 등이 전통적인 CAE(Computer Aided Engineering) 분야이며 현대 시뮬레이션 기술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CAE는 모사라기보다는 복잡한 계산을 컴퓨터를 이용하여 처리하는 수치해석의 개념이기는 하지만, 근래에는 다양한 시뮬레이션과 연계하여 정밀한 계산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보아 시뮬레이션 기술로 보기로 한다.
전통적인 시뮬레이션, 즉 CAE는 현실(부품, 시스템)을 대개는 수학식을 이용하여 모델링하고 해석한다. 요즘은 수학식과 경험식(실험 결과 등)을 연계하여 해석을 수행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경험식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만든 언어인 수학식으로는 현실의 모든 것을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치해석은 바로 이 부분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다.
이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시뮬레이션 기법이 제안되었고 지금도 많은 기술들이 개발되고 있다. 현재 많이 사용되는 몇 가지 기술을 우선 알아보고 자동차 개발자들에게 이 시뮬레이션 기술들이 얼마나 유용한 지 언급하도록 하겠다.
우선 HILS(Hardware-In-the-Loop Simulation) 기술을 살펴보자. HILS는 말 그대로 실제 하드웨어를 포함하는 시뮬레이션 기법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학식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기술할 수 있다면 대단히 편리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기법으로 제안된 것이 바로 HILS이다. 그림 1은 대단히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수학식으로 모델링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부품 또는 시스템을 아예 실제 하드웨어 상태로 연결하여 시뮬레이션을 수행하는 개념으로 바로 HILS이다.
ABS(Anti-lock Brake System)의 개발 과정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ABS의 구성요소에는 운전자의 페달 조작, 이에 대응하는 유압 시스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제어하는 제어기가 있다. 만일 ABS 개발자가 운전자의 제동 행위와 유압 시스템을 전부 수식으로 모델링하여 ABS 제어기를 개발하고자 한다면 이 개발자는 ABS 제어기 개발에 앞서 운전자 모델과 유압 시스템 모델 개발 및 검증에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시간 투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개발된 모델들이 과연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 등 어려운 문제들이 더 쌓이게 된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운전자와 유압 시스템을 실제 사람과 하드웨어로 대체(전기적 인터페이스를 통해서)하고 개발자는 ABS 로직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고안한 방법이 HILS이다.
이러한 HILS는 실시간으로 시뮬레이션이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와 반도체 기술이 어느 정도 발전된 이후에야 현실적으로 가능한 기술이다. 물론 지금은 많은 분야에서 HILS 기법을 이용하여 제품 개발, 특히 제어기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수학적 모델링이 어려운 부분을 실제 하드웨어로 대체하여 개발 과정에서의 시간과 비용을 단축하도록 고안된 HILS는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시스템을 사용하는 사용자(운전자)의 응답을 정확하게 분석하기 어렵다는 점이고, 또 센서와 같은 입력 신호는 여전히 가정 또는 모사하여 사용한다는 점이다. HILS의 단점은 또 다른 시뮬레이션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나 HILS를 대체하는 개념이 아니라 HILS와 상호보완되는 시뮬레이션 기술을 요구하는 것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림 2에 보이는 바와 같이 VR 기술은 보통 자동차 전체를 대상으로 운전자를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통상 ‘Driving Simulator’라 불리는 이 시뮬레이션 환경은 (개조된)실차, 운전자, 가상현실 생성기, 모션 재현기, 소리 재현기 등으로 구성되며 최근에는 HILS를 접목하여 보다 정밀한 환경을 재현하기도 한다.
VR 기술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동차 분야뿐만 아니라 항공기, 방산 등 여러 산업 분야에서 수십 년 동안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컴퓨터의 발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특수한 용도로만 사용되다가 90년대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VR을 이용한 Simulator는 실차를 직접 이용하여 마치 도로를 실제로 달리는 것처럼 모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ABS 개발자는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는 로직을 차량에 적용하여 실차 주행시험을 실시하면서 동시에 VR을 이용하여 ABS 작동에 따른 운전자의 반응, 차량 레벨에서의 소음 정도, 주행 편의성 등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제품 개발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VR과 HILS를 연계하여 사용할 경우 개발자는 더 편리하고 정확하게 개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시뮬레이션 툴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과 인력이 소요되지만, 완성차 업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툴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지금은 보편화돼 있다.
VR과 HILS, 이 두 가지 툴이 있으면 엔지니어의 고민은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민을 다 털어 버리기에는 아직은 아니다. VR, HILS 역시 현실 세계를 반영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 이 말은 시뮬레이션 과정에서 아직도 많은 부분을 가정(assumption)하고 진행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ABS 개발에서는 도로의 미끄러운 정도를 HILS와 VR에서 정확히 구현하기 어렵다. 또한 후측방경고시스템의 경우에도 카메라와 같은 센서를 정확히 모사하기는 어려운 점들이 많다. 이런 부분들은 적당한 상황을 가정하고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소비자들에게 고품질의 자동차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좀 더 현실성 있는 시뮬레이션 기술이 필요하다. 굳이 따지자면 꼭 소비자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복잡한 시뮬레이션 기술로 인하여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일단 한번 가동되면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시뮬레이션 기술의 특징이기 때문에 현실성 있는 모사 기법의 정착은 엔지니어에게도 매우 중요하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최근에 제안된 좀 더 현실성 있는 시뮬레이션 기법은 가칭 VV-HILS(VR based Vehicle-Hardware In the Loop Simulation) 기술이다. 가칭이라는 말은 아직까지 현장에 정착된 기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 3과 같이 VV-HILS는 HILS, VR 그리고 주행로의 결합이다. 이는 기존의 시뮬레이션 기술들이 가지고 있는 제약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으나 그 유용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VV-HILS는 현재 자동차부품연구원에서 지식경제부의 지원을 받아 구축을 진행하고 있다.
VV-HILS는 VR과 HILS 그리고 짧은 주행로를 전부 포함하고 있다. 운전자는 VR 속에서 가상의 도로를 주행하게 된다. VR에서 구현되는 운전자 차량과 주변 차량들은 짧은 주행로 내에서 실제로 달리는 것처럼 구현된다. 짧은 주행로 내에서 구현하기 위해 다이나모와 레일 시스템을 이용하여 상대속도 개념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그림 3에 보이는 것처럼 운전자 차량 외에 다른 차량들은 레일 또는 모바일 로봇에 더미 형태로 탑재되어 가상현실 속의 상황을 실제로 구현한다.
운전자 차량은 독립 구동이 가능한 4륜 다이나모 위에서 VR에 속해 있는 운전자의 조작을 그대로 재현한다. 독립 구동이 가능한 4륜 다이나모는 ABS, TCS 등에 실제 도로와 같이 반응하도록 설계된다. 따라서 VV-HILS는 운전자, 실제 차량, 주변 차량 등 자동차 시뮬레이션에 필요한 많은 부분을 실제 현실과 똑같이 재현할 수 있게 된다. 개발자들에게 매우 유용한 시뮬레이션 툴임에는 틀림없다.
이제 복잡한 지능형 시스템을 개발해야 하는 개발자에게 그 해결책이 보이는 듯하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좀 더 현실성 있는 시뮬레이션 툴을 활용함으로써 개발자들은 복잡한 현실을 실험실 안으로 가져올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곧 고품질의 제품을 안정적으로 개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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